잠시 후.
삽시간에 분위기는 정리된다.
공부방 안의 책상에는 유나와 내가 앉아 있고, 컴퓨터 잡고 있는 것은 근휘.
"여기서 여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음, 태양 마차를 끌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간곡히 무시했다라...... 이게 곧 죽을 거라는 암시가 되는 거지."
"복선?"
"...잘 알면서 물어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지?"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서."
어느새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되었던가?
잠깐 화장실로 가는 사이에 근휘가 점유하고 있는 컴퓨터를 본다.
"뭐해?"
근휘는 놀란 듯했고 재빨리 사라지는 화면들.
그리고 거기에는 Visual Studio 2005(주 : 프로그래밍을 하는 도구입니다)라는 이름의 창만이 남았다.
"어이! 형씨!"
"뭐, 뭐야? 내 일 신경쓰지 말고 가던 길 가!"
"내 앞에서 숨길 게 뭐 있어? 하던 게 뭐야? K대비? 아니면, 거창하게 IPAO(주 : 아시아-태평양 정보 올림피아드)라도?"
"그, 그래, 시험공부 다 포기하고, 내년 K대비 하고 있어. 어쩔래?"
"글쎄, 가던 길 가라니까."
하지만 이런 손놀림에 익숙하다는 듯 유나가 뒤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지긋이 Shift + F2를 눌러 본다.
예상대로 뜨는 창은 "VisualBoyAdvance-100%"(주 : 100%는 실제 GBA 속도의 100%, 즉 정상 속도라는 소리입니다)
"!!!!!!"
"놀려면 놀 거지, 얘 왜 우리 앞에서 보스키를 쓰는거야?"
"보스키?"
보스키가 뭐지?
"'헉, 뒷통수 조심해!' 실행 파일 이름이 bosskey.exe인 관계로 일명, 보스키. 자기가 선택한 프로그램을 숨겨주는 프로그램. 자신까지 같이 숨어버리지."
"............"
전화가 한 통 온다.
전화번호가 복잡하네?
틀림없이 국제전화다. 그런데 국가코드는 1?
미국에서 전화?
미국에서 온 국제전화를 안 받으면 실례다. 받아야지.
"여보세요?"
"상욱아, 잘 지내고 있어? 해외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아무래도 아예 1년을 눌러 살아야겠구나. 잘 지내."
그리고 끊어지는 전화.
이거, 완전 L모씨 블로그의 소설에서 봤던 상황하고 같잖아.
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좋은 것을 어쩌랴, 최소 그 동안은 부모님의 나와 유나에 대한 평을 들을 필요가 없으니까.
"무슨 전화야?"
"어? 부모님 해외에서 1년을 더 계시겠다네."
"진짜? ......"
저 뒤에 근휘는.......
어이구, 보스키를 쓴다고 해도 그거는 정면에서의 일이다.
"어? 어? 어? 서...브...탱...크...먹어야지! 아, 안돼!!!!!!"(주 : 서브 탱크는 록맨 제로나 록맨 X에서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탱크입니다)
...얘, 뭔가 캐막장 아냐?
그냥 그 녀석은 내팽개치고 우리끼리 시험 공부를 하기로 했다.
말 해봤자 중독증이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나는 사회와 국사를 폈다.
예상대로 사회를 보자마자 부르지도 않은 잠신이 강림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그렇게 어려워?"
"빙고. 나는 그런 쪽의 암기는 능력이 좋지 않아."
"근데 솔직히 그렇게 따지면 국어도 순 암기잖아."
"에에...그건 말이지......내가 관심 있는 분야와 관심 없는 분야의 차이라고."
"...정치에 혹시 환멸이라든가 그런걸 느껴?"
"에에...그런 셈이지?"
와, 순간 당황했다.
그런 것 쯤은 그냥 넘어가 줘야 하는 게 아니니, 유나양?
그리고 한참 수요와 공급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게 말이야, 사는 사람이 많으면 자연히 물건은 사려는 사람의 수효에 비해 희귀해지게 될 것 아냐. 그러면 어차피 다 팔 수 있으면 파는 사람은 살 사람이 적어지더라도 값을 올려서 파는 것이 이익이지. 반대로 물건이 많은데 살 사람이 없을 때는 값을 낮추면 살 사람들도 상당히 될 거잖아? 그래서 값 비싼데 안 팔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값을 싸게 해서 더 팔리게 하는 것이 낫지. 그런 이유로 저런 곡선이 나오는 것이고, 수효자와 공급자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결국 있는 거지."
"그런데 말야, 다이아몬드는 왜 비쌀수록 더 많이 사려고들 그래?"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 명품이나 보석 같은 것은 과시용이니까 해당이 되질 않아."
"아, 그렇구나. 비쌀수록 자기가 경제력이 있다는 거니까?"
".....하아, 그래서 내가 그런 쪽에서 가끔 허무주의를 느낄 때가 있어."
"허무주의라......"
갑자기 시험 공부 시간에서 자기 독백으로 바뀌다니?!
"저런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잘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어. 사실 수줍은 것도 그 때 생겼던 것 같아. 허무주의라는 것이 어느 정도 없어진 뒤에도 수줍은 것은 꽤나 오래 갔어."
그러고 보니까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래서 그런 것을 이겨보려고 '여자답지 않은' 취미를 많이 만들어 봤었지. 그 때 던파도 아주 미친듯이 했었어. 집에는 앰프와 기타가 남아 있고, 아직도 하루에 한 번씩 쳐. 아파트가 아니라서. 멜티블러드, KOF, 그런 쪽도 그 때부터 손을 댔던 거지. 근데 수줍음을 이겨보려고 했던 취미 활동이 지금은 내 이미지를 '사귀어 보면 깨는' 이미지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던 것 같아."
"......"
어느새 야심한 밤이 되었다.
근휘는 "재미 없어"라면서 먼저 가 버렸다.
"자고 갈까?"
유나가 말한다.
"아냐, 그냥 가.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 나야 뭐 부모님 해외 출장이시지만."
"그래? ......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해 주는 줄은 몰랐네. 어쨌든, 내일도 보자!"
* 18편을 드디어 올렸습니다.
6개월만이군요.
하지만, 또 얼마간 잠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1. 일단 기말고사가 D-8(2008.06.19 23:46에 이 글이 작성되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다니. 한심하군요[.....]
2. 소설 자체에 재구조화가 필요합니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에 미숙한 상황에서, 위험하게도 실제 지명 등을 끌어들이고, 심지어는 아직 올라오지 않은 편을 생각하면서 제가 다니는 교명이나 내부 사정까지 끌어들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리타니아라는 분이 제게 깨달음을 주는 데 일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18편에서 모두 20% 정도씩 수정이 이뤄지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수정에서 일어날 일은,
1) 결실된 프롤로그의 추가. 프롤로그가 없으면 도저히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 것 같아서 예전에 썼던 프롤로그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만 부활시킵니다.
2) 실제 교명이라든가 여타 상호나 단체명이 그대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등장할 경우에는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단체의 내부 사정이 공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사실들이 왜곡될 것입니다. 상욱일기는 애초에 소설이라서 픽션을 전제로 깔아두고 쓰는 소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왜곡되었다고 뭐라 하지 마십시오.
3) 플롯의 전개가 더 매끄러워지도록 18편 전체를 모아 놓고 수정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 수정은 modification이 아니라 complete rewrite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설 카테고리에 있는 모든 '이상욱의 일기' 관련 글들은 이 포스팅이 있은 지 7일간 개방되고, 그 뒤에는 재구조화를 완료할 때까지 비공개 처리하겠습니다.
독자(...가 있을라나?) 여러분께 사과 말씀 드립니다.